위드코로나와 목욕탕에 관한 단상
출근 러시아워와 겹쳐 멀리 이동해야 할 일이 있어, 기상 시간은 유지하고 씻는 시간을 이동해 일찍 출발해서 교통 체증을 피하고 목적지 근처 대중탕에서 씻고 준비를 하기로 했다.
이를테면 목적지에 도착해야 할 시간이 9시인데, 6시에 기상해 7시에 출발하면 러시아워와 겹쳐 2시간 걸릴 걸, 6시에 잠에서 깨자마자 출발해 7시 10분쯤 도착해 뜨거운 물에 몸도 녹이고 피로도 풀자는 발상이다. 불과 1-2년전만 해도 상상도 할 수 없던 선택인데.. 나도 이제 어쩔 수 없는 사우나 좋아하는 아줌마가 되어버린 걸까?
지난주 토요일, 남편과 "듄"을 보러 가기 전 애매하게 시간이 남았고, 아침에 제대로 씻지 못하고 나와 찝찝하던 차에 영화관 근처 목욕탕에서 각자 씻고 나오기로 했다. 다이소에서 샴푸, 린스, 폼클렌징, 바디워시가 조금씩 들어있는 일회용 샤워세트 하나씩 (개당 천원), 이태리 타올 (두 개 천원), 여행용 크림 (천원, 뚜껑 있음)을 사서 한시간 반 후에 만나자 하고 이름도 친근한 아미고 사우나로 향했다.
마스크와 속옷만 입은 채 일사분란하게 움직이는 세신사님들, 알몸에 마스크만 쓰고 안개가 자욱한 사우나에 누워계시는 할머니들! 익숙하고도 생경한 풍경이었다. 분위기를 보아하니, 각자의 샤워/때를 미는 자리에서는 마스크 미착용, 공용 공간에서는 마스크 착용이 국룰인듯 했다. 머리를 감고, 샤워를 하고 그다지 청결하지는 않은 욕탕에 몸을 담그니 진짜 몸에서 유해물질이 서서히 빠져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에 집에서 물을 받아서 몸을 자주 담그는데도, 이건 뭔가 Next Level 저 너머의 무엇이었다...
일반 탕에서 시작해 아주 뜨거운 열탕으로 옮겨 처음엔 반신만, 나중에는 목까지 담가 땀을 쭉 내고 나니 용기가 생겨 죽을때까지 절대 못 할 것 같던 냉수욕도 해보고, 마지막에는 묵은 때도 벗겨냈다.
남편은 약속한 시간보다 10여분 늦게,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힌채로 나왔다. 왜 늦었냐고 물으니 처음에는 때 밀기도 싫고, 대충 밀려고 시간을 대충 잡았는데, 밀다 보니 무아지경이 되었다고, 목욕 마치니 기분이 참 좋다고 해서 나도 기분이 좋았다고 이야기 해 주었다. 남편의 말랑말랑해진 팔꿈치를 만지고, 담배냄새가 쏙 빠진 체취를 맡으니 아주 상쾌했다.
어릴땐 목욕탕 특유의 습한 공기, 뜨거운 욕탕, 따가운 엄마의 때밀이 타올, 알몸의 부끄러움 때문에 목욕탕에 가는게 싫었는데 이제는 열기에의 탐닉, 피로의 배출기능, 두껍게 쌓인 사회의 때를 벗겨내기 위해 목욕탕으로 향하고 싶어지는 것일까?
오늘 아침 낯선 일산의 마그넷 목욕탕/헬스장에서는 목욕탕 고인물 아주머니의 대화가 재미있었다
아줌마 : "요즘엔 새벽 두 시면 잠이 깨서 잠이 안와"
나 : (두리번) (아무도 없음)
아줌마 : "젊을 땐 잠이 모자라 죽을것 같았는데~ㅋㅋ"
아줌마2: "언니 안녕, 오늘 운동 올려고 했는데 아침에 차 배터리가 나가서 목욕만 하고 간다"
아줌마: "차가 돈덩어리야 돈덩어리!" (전화를 받는다) "중국어 ㄴㅇㄹㄴㅇㅁㄹㄴㅇㄹ"
아줌마2 : "언니 중국어 잘한다"
아줌마: "나 중국사람이니까 중국어를 잘하지"
아줌마2: "언니 중국사람이었어? 나 언니 부산사람인줄 알았는데?"
